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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각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에 대한 (개인적) 해석

해미 그리고 그레이트 헝거


해미는 말이나 행동, 직업 등에서 얼핏 가벼운 인상을 주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삶의 의미를 갈구하고 위대한 자유를 꿈꾸는 인물이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자주 그리고 (일상적 시각으로 보기엔) 뜬끔없이 복 받쳐 오르는 감정, 눈물 등을 통해 표출된다. 그렇게 충만함을 꿈꾸는 해미건만 그녀의 현실은 공허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해미는 나름의 방식을 익히게 되는데 바로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라' 이다. 해미는 '없다는 것을 잊기' 위해 판토마임을 배우고, 없는 귤을 맛있게 먹으며 , 고양이가 없다는 것을 잊은 채 고양이를 키운다. 불안한 알바일이 '자유'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해미는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애써 잊은 채 산다.


해미는 그 어떤 높은 경지(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저 먼 아프리카로 떠나지만 거기서 벤을 만나고 결국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해미의 날갯짓은 허망하게 꺾인다. 해미는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의미, 정체성, 자유 의지를 잃어버리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해미는 벤을 만나 가짜가 되고 결국 진짜 해미는 사라지는 것이다.


영화상에서 해미의 눈물을 이해해주는 자는 없다. 해미는 두 차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데 첫 번째는 레스토랑에서 벤과 친구들 앞에서 추는 춤이다. 해미의 그레이트 헝거춤은 무시당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의 클럽에서 추는 춤은 환호를 받는다.두 번째는 종수 집 앞마당에서 종수와 벤 앞에서 추는 춤인데, 이번에도 해미의 춤은 존중받지 못하며 종수에 의해 비난받는다.


벤 그리고 비닐하우스


벤은 종수에게 2주에 한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한다. 비닐은 영어로 '가짜, 거짓된, 인조의'라는 뜻을 가진다. 비닐하우스도 결국 '가짜 집'이 아닌가.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은 공허한 인간을 거짓된 존재로 바꾸어 존재 의미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벤의 말대로 '비처럼, 자연의 도덕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해미처럼 그리고 해미의 전과 후에 벤을 만나는 많은 여성들처럼, 삶의 공허 속에서 기반을 잃은 여자들은 벤의 마수에 걸리고 이들의 불안한 존재는 쉽게 벤에 의해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석유를 뿌리고 불만 붙이면 10초만에 끝난다. 벤이 해미 다음에 나오는 여성에게 립스틱을 발라주며 묘한 미소를 짓는 장면이 있다. 립스틱은 석유를 원료로 하는 제품이며 (진짜 입술색이 아니므로) 또한 거짓된 색이다.  화장을 받는 여성의 벤을 향한 설레는 미소도 거짓이다. 마치 해미가 종수에 대한 사랑을 뒤로 한 채 벤을 만난 것처럼.


종수, 섹스와 자위 그리고 소설


해미와 종수는 서로를 사랑한다. 둘은 해미의 집에서 관계를 가지는데, 이는 남산에 반사된 햇빛이 실낱같이 벽에 비치는 찰나의 순간, 즉 기적의 시간에 이루어진다. 그 후 해미는 떠나고 종수는 텅 빈 해미의 방에 올 때마다 자위를 한다. 빛은 사라졌고, 서로 사랑하는 이들의 살맞댐과 사랑의 나눔은 순간의 빛과 함께 사라진다. 그 후에는 멍한 표정의 일시적 쾌락만이 남을 뿐이다.


종수는 점차 '없다는 것을 잊는' 해미의 방식을 배워나가는데 처음에는 고양이가 없다는 것을 잊은 채 밥을 주고, 그 다음에는 해미가 있지도 않은 우물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그 다음에는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은 채 해미가 종수를 애무해주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텅 빈 해미의 방에서 무엇인가를 상기된 표정으로 써 내려간다.  종수는 극 중에서 반복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 내내 단 한 차례도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든가,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한다든가 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종수 집의 좁은 책꽂이에 소설은 안 보이고 사전이나 참고서 등의 낡은 책들만이 꽂혀 있으며, 종수가 단 한 차례 글솜씨를 발휘하는 때는 감옥에 간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쓸 때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벤은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집은 각종 명화들로 가득 차 있으며 벤이 가족과 식사하는 장소도 미술관이다. 즉 종수는 소설을 꿈꾸지만 실제 종수의 삶에는 소설이 없다. 이는 고양이를 키우는 해미의 집에 고양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면 벤의 삶은 실제적이다. 그는 미술을 꿈꾸지 않지만 미술로 둘러싸인 삶을 살아간다. 없던 고양이(보일이) 또한 벤의 집에 오면 실제가 된다. 이렇게 이들의 삶은 대조적이다.


다시, 종수는 해미 방에서 무엇인가를 써내려가는 데 아마 이 것은 소설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종수는 벤을 찾아가 그를 죽인다. 나는 이것이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이며 종수가 소설 속에 쓴 내용이라고 보고 있다. 종수가 벤을 죽이기 전의 장면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쓰는 장면이 나왔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종수는 영화 내내 명확하게 분노하지 못하는 자이다. 상하차 아르바이트 장면에서도 보이듯이 분노할 타이밍에서도 종수의 분노는 금방 사그라든다. 종수의 살인은 종수의 소설 속의 메타포 중 하나인 것이다.


종수와 해미


해미는 종수를 사랑하며, 종수의 낡은 집에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해미는 벤을 따라간다. 여기에는 어떤 망설임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종수를 사랑하면서도 벤을 따라가는 해미의 태도는 마치 자연의 도덕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종수 또한 이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종수는 단 한 차례 해미를 비난하는데 바로 해미가 집 앞마당에서 벗고(외부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상태) 춤을 춘 이후이다. 그는 해미의 자유를 향한 날갯짓을 이해하지 못하고 창녀라 비난한다. 그렇게 처한 환경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은 함께 하지 못한다. 사랑은 무기력하다.  내리는 비 앞에, 자연의 도덕 앞에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총평


아무래도 이창동 감독의 전작이 '시'이고, 또 뛰어난 영화였던 만큼 그것과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개인적 소감으로 '시'는 좀 더 감독의 본능적인 스토리 전개가 이루어진 느낌이라면 '버닝'은 머리로 계산한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시'에서 미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서(성매매) 소녀의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한 죽음으로서(투신) 소녀에게 용서를 구한다. 또한 그럼으로서 미자는 손자가 되고 또 죽은 여학생이 되며, 그럼으로서 개인들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미자의 죽음은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향한 한 발짝이다. 그에 비해 종수의 살인은 허무하다. 종수의 살인은 개별적이며 그 후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죽음을 앞둔 미자의 차분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종수는 살인을 저지르는 그 자신조차 행위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 외에 부르주아를 상징하는 벤과 그의 친구들의 성격 묘사가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안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벤이 개별적, 개성적 인물이라면 영화의 전체적인 무게감이 떨어질 것이고, 벤이 경제적 계층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그의 독특한 성격 묘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돈이 많다고 해서 좌절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고, 열정을 모른다고 상정하는 것은 지나친 적대심에서 나오는 왜곡이 아닐까.